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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ysvillain
아렌트 『교육의 위기』( Hannah Arendt 『The Crisis in Education』) 논평 본문
아렌트 『교육의 위기』( Hannah Arendt 『The Crisis in Education』) 논평
Physvillain 2021. 11. 28. 08:06교육의 위기와 아렌트가 제시한 세 가지 가정
아렌트는 교육의 장에서 반복되는 위기에 대해서 말하며 이것이 국가적인 틀에 속해 있지 않으며, 즉각적인 효과가 감지되지 않는 난해한 문제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위기에 편견으로 대응한다면 재앙이 될 것이라 말하듯 미국에서의 교육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바라보았던 이유로는 그녀의 정치적 생애와도 관련이 깊다.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인간이 정치 활동을 통해 공동 세계에 참여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그저 세상에 표류하는 대중으로만 머물면서 자신과 세계에 책임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서 교육은 우리의 이 세계를 위해 책임있는 성인으로 아이들이 자라도록 하는 일과 상관됨을 깨닫게 된다. (조나영, 2015) 새로운 것에 대한 열광과 신뢰의 바탕에는 유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사회에 진입하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따라서 교육은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정치에는 성인(成人)의 절대적 우월성에 의존한 독재적 개입으로 아이들에게 사상주입을 하는 등 전제적 혁명운동이 이루어졌다. 비록 새내기들이 신세계를 열어나감에 있어서 구세대의 정치 체제 내에서 타산적인 반발이 존재하고 그러한 것을 교육이 떨쳐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역사적 연속성 아래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특히나 미국이라는 국가적 특수성에서 비추어 보면 이 교육의 위기는 더욱 중요성을 가진다. 미국의 학력 저하는 오히려 미국이 선진화되어있고 근대적이기 때문이며 대중사회의 요구 속에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표면상의 결과이다. 기회의 균등은 의무교육 기간을 늘렸고, 교육은 더 이상 부유층의 특권이 아니게 되어 대중사회의 본질에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는 영국과 같은 능력주의와 같은 사례가 존재하기에 단지 미국에 있어서 이러한 위기를 심화시키는 것은 미국의 정치적 성향이다.
아렌트가 제시한 현대 교육을 위태롭게 하는 세 가지 가정은 각각 다음과 같다. (1) 아이들에게 허락된 과도한 자유와 아이들만의 자율적인 세계의 허용(아동중심주의 교육사조의 비판) : 아이들은 어른과의 갈등을 넘어선 아이들 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회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으므로 비행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순종주의적이 되기도 한다. (2) 교사 전문성과 권위의 상실(실용주의/경험주의의 비판) : 교수법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사가 전공 과목을 무시하는 결과가 초래됨. 교사는 더 많이 알아 권위를 갖는 게 아니게 되어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었다. (3) 진지한 배움의 부재와 기술적 학습의 강조(아렌트의 교육에서의 보수주의적 관점) : 근대에 주장해온 실용주의의 문제로부터 학습을 실천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이다. 교사가 교수법만을 강조해왔던 배경도 이 가정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이러한 기본 가정의 파괴성을 인식하고 전면적으로 변혁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상회복으로 가고 있으며 다시금 권위와 손잡고 지식의 습득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교육의 위기로부터 깨닫는 교육의 본질 : 탄생성
새로운 구성원으로서의 아이들은 이중적인 면을 갖는다. 그들은 낯선 세계 속의 존재(세계와의 관계)이기도 하며 인간이 되어가는 존재(생활에 대한 관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인 면은 당면한 교육에서도 드러나게 되는데, 인간이 되어가는 존재로서의 교육이 이루어 진다면 생명의 유지나 생존을 위한 훈련이 목표가 될 것이고, 세계 속의 새로운 존재로서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한 아이의 인생과 성장, 세계의 존속을 책임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탄생성의 맥락에서 아이는 세계로부터 파괴적인 일을 당하지 않아야 하고, 세계 역시 새내기로부터 피과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모순 관계를 교육이 어떻게 극복해낼 것인가? 학교는 가정이라는 사영역과 세계 사이의 매개 기관이다. 복지에 대한 책임 이외에 아이들의 유별성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발달에 관한 책임을 어른들이 떠안게 된다. 아이와 어른은 서로 그들만의 세계에 남겨져서는 안 되며 탄생이라는 사건에 책임있는 태도로 세계에 함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아렌트에게 교육은 아이가 가진 새로움을 보전하여 새로운 것으로 낡은 세계에 소개해야 하는 소명적인 행위이다.
교육의 장에서 책임은 권위의 형태를 지니게 되고, 정치 영역에서 시작된 권위의 상실은 사적 권위의 상실로 종결된다. 근대의 교육 문제는 권위나 전통을 무시할 수 없는 반면 권위에 의해 구조화되지도 않고, 전통으로 함께 묶이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교육은 공적/정치적 삶의 영역과 확실히 떼어내어야 하며 일반적 타당성과 교육에서의 적합성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교육에서는 이러한 일반적 타당성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권위의 개념과 과거에 대한 태도만을 적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세계와 아이,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줄다리기에서 교육은 오직 성인과 아이들의 관계, 그러니까 교육의 영역에서만 유효한 보수주의적 입장인 것이다. 아렌트 본인의 정치적 생활은 비록 자유주의적일지라도 교육에 있어서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지향하는 이유라면 분명 변화의 태동이 될 아이들의 아동성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를 보호하는 것을 교육의 최우선 과업이라고 본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발현시키는 일의 기저에는 ‘탄생성’이 있으며, 아이들의 탄생에 의해 새로움을 소개하는 일이 바로 교육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며 자신이 경험할 세계를 바꾸어 낼 잠재적인 능력을 가진다. 하지만 그들의 새로움은 종종 기존의 것들과의 관계에서 가로막히게 되곤 한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것들에 완벽하게 순응하여 ‘새로운 낡은 것’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새로움의 발현, 세계를 새롭게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숙명적인 책임이며 때로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칭해지기도 한다. 세계의 지속적인 경신이 없다면, 교육에서 탄생성이 외면되고 무시된다면 기존의 낡은 세계에서 변화나 혁신과 같은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고 희망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자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실무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로, 구세대와 신세대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대한 존경심(로마적인 태도 : 인간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외견의 공동체에서 사라져가지만 자기 존재의 가장 특징적 형태에 도달함)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육자가 극복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실용주의/경험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동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로 학교의 기능이 아이들에게 살아가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 세계가 어떤 곳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앞서 교육의 위기를 자초하는 가정으로 제시된 바가 있는 배움의 부재와 기술적 학습의 강조와 그 한계점에서부터 나온 결론일 것이다. 생활에 직접 유용한 내용과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내용 사이에는 그 교육내용으로서의 성격으로 보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그것을 배울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일상생활 속의 사태를 통해 배울 수 있고, 또 그 필요를 느끼는 사람에 한하여 그 사태 속에서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예컨대 퓨즈를 갈아끼우는 법을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이 퓨즈를 갈아 끼우는 것을 눈여겨보거나 그 방법을 물어서라도 배우려고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도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교육이 분명 학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고, 학교가 꼭 해야 할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생활에 직접 필요한 것은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만 배워야 할 내용인 것이다. 이에 비해 현상을 설명하거나 또는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내용은 모든 점에서 전자의 내용과 대별된다. 이해에 필요한 내용은 일상 생활 속에서 배울 가능성도 희박하며 그것을 배워야 할 필요도 생기지 않는다. 빛이 직진한다는 것을 몰라도 일상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만약 이를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내용이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으로서 꼭 배워야 할 내용이라면 그것은 분명 학교라는 곳에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홍우 저 ‘지식의 구조와 교과’에서는 전자의 경우와 같이 어떤 일을 ‘하는’데에 필요한 지식을 ‘하는 지식’이라고 칭하고, 후자와 같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을 ‘보는 지식’이라고 칭한다. ‘보는 지식’은 그 중요성을 배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그 배움의 가치를 믿지 않은 상태로 배워야 하기 때문에 교육에서의 강제성이 어느 정도는 필요한 것이고, 지난 프레이리의 논평에서도 주입식의 형태를 띠는 교육도 ‘괜찮다’고 과감하게 말했던 것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교육은 반드시 가르침이 있어야 하며 배움이 없는 교육은 공허하기 때문에 도덕적-감성적 수사학으로 변질되기 쉽다고 말한다. 칸트 역시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직관’은 경험에 해당할 것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아직 틀과 형식으로써 정리되지 않아 맹목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아렌트는 요컨대 후자, 개념 없는 직관과 같은 맥락으로 배움 없는 교육을 말했으리라. 경험에만 충실한 교육은 알맹이가 없다. 경험에 합리성을 두는 교육은, 특히나 과학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이 마치 신비한 것이고, 과학이란 설명력이 없고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뉴턴 법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데 이것이 우리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들의 경험에 더 잘 부합하는 -그러나 오늘날 과학이라고도 불리지 않는-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의 임페투스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를 위한 과학(science-for-all)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배움이란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지식의 가치가 꼭 모두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겐 뉴턴의 운동법칙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임페투스 이론이 더욱 삶에 있어서 더 설명력 있고 배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학생들에게 있어서도 직관, 즉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 더 넓은 사유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가르침은 교육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비록 이러한 경험주의에 대한 경계의 결말이 오늘날과 같은 지식의 주입만이 남은 교육일지라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훨씬 낫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아이들을 성인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아동중심주의에 대한 경계 역시 이전의 실용주의/경험주의의 비판과 같은 맥락에서 아이들에게 공부와 놀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고 진지한 배움의 의미를 일종의 ‘재미’와 ‘유희’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 교육의 위기를 가져온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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